일본 애니의 국내판 방영에 대해 by Robert

진정한 만화인이라고?(츠키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글을 읽고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옛날 이야기를 좀 늘어놓고 싶어졌다.

 내가 처음 애니메이션(일본 애니)를 접한것은 대략 87년 정도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에 일본에서 살다 온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를 통해 일본애니의 고전들(퍼스트 건담이라든지, 뱀파이어 헌터 D, 우르세이 야츠라 같은 것들)의 TV녹화판을 보곤 했었다.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을 보고 제멋대로의 해석을 붙여 가면서 재미있게 보았었다.

당시엔 엄청난 문화충격

간지남 D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1학년이 되면서 좀 더 본격적인 자료입수가 시작되었다. 당시 명동의 지하상가에는 LD(Laser Disk)를 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해주는 업체가 몇 군데 있었고 원래는 영화나 공연 실황 LD등을 테이프에 복사해주는 가게들이었는데 거기에 가물에 콩나듯이 입수되는 애니메이션들을 VHS로 복사해와서 그 깨끗한 화질에 감탄하면서 시청하곤 했다.

 그 당시는 일본에서도 OVA(Original Video Animation)이 한창 중흥하고 있던 때이며 많은 명작들이 LD로 나왔었다. 나와 같은 요구를 하는 오덕(?)들이 많아지자 해당업체에선 애니메이션의 비중을 점점 높여 갔고, 내가 보유한 복사 애니의 수는 점점 늘어 갔다. 물론 주말마다 명동에 가면 중국 대사관 앞의 일본 서적 판매 업체에서 뉴타입이나 일본 잡지 혹은 코믹스들을 구입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코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의 재미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즐기지 못하는 소수의 취미'를 즐기는 부분에도 분명히 어떤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설프게 독학한 가타카나를 자랑스럽게 읽으며 즐거워했고 잡지에서 입수한 최신 애니메이션의 정보를 공유하며 우리들만의 커뮤니티 같은 것을 형성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 년이 지나자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90년대 후반이 되자 애니메이션이 장사가 된다는 걸 깨달은 업자들은 최신 일본 애니를 입수해서 자막을 입힌 VCD로 만들어 용산 등에서 판매했고 그야말로 아무나 애니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기 최고의 히트작


  이 때 느낀 나의 감정은 '내가 즐기는 이 재미를 많은 사람이 느끼게 되었구나'라는 기쁨이라기 보다는 '개나소나 애니를 보게 되었구나'라는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내 자신을 애니를 즐기는 소수, 즉 약간은 특별한 존재로 생각을 하다가 그 대상이 확대되자 '더 이상 나의 특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트랙백한 글을 읽으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저 서명운동을 주도(?)한 자칭 '진정한 만화인'이라는 사람이 느낀 감정이 내가 저 시기에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글루스에는 수많은 오덕들이 존재하지만 이글루스에서 한발만 밖으로 나가도 사회는 오덕의 상식과는 심하게 많이 떨어져 있다. 애니를 보는 취미는 사회 전체를 볼때 그렇게 메이저한 취미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애니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마이너한 취미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음과 동시에 자신이 다른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특권 내지는 자격(?) 같은게 있다는 느낌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애니를 (다운받아)보는 사람들은 내가 과거에 그러했듯이 자신이 '일본 성우가 연기하는' 일본 원판 애니(자막이 없으면 못보지만)를 본다는 것에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특권의식 비슷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특권이 '한국 성우의 더빙을 입혀' 비록 케이블이지만 만인의 것으로 공유되는 데서 자신의 특권의식이 소멸되는 듯한 상실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역시 일본 애니는 원판을 봐야지' 라든가 '한국 성우가 더빙을 하면 원판의 그 맛이 안나'라든가 하는 식의 반응, 나아가서는 '저놈들이 원작을 망쳤어'같은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꼭 국내 제작 컨텐츠가 아니라도 국내에서 방영할 수 있는 컨텐츠가 늘어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깨닫기 전까지는 모른다. 애니라는 적어도 국내에선 마이너한 장르의 취미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으려면 투니버스같은 공식 매체에서 꾸준히 컨텐츠를 제작하고 수입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걸 모르고 공짜로 다운받은 컨텐츠에 대한 같잖은 정신적 기득권에 매달려 찌질거리고 있으니 그저 보기 괴로울 뿐이다.

덧글

  • 츠키 2008/02/20 19:40 # 답글

    87년에 태어났는데..;;(아 이게 아니지) 여하튼 예전에 놀다가도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 되며 들어가서 TV앞에 앉아본 적이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 이런 문제에 대해 분노가 치밀지 않을까 합니다..
  • 아퀴냥 2008/02/20 22:18 # 답글

    '특권의식'에 한 표.지금 생각하면 어줍잖은거죠..>_< 투니버스가 컨텐츠 개발하는 것도 있나요? 90% 일본만화 틀어주기만 하는거 같은데. 비주류매체에서 일본미국외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만화/애니메이션 다루는것을 거대매체에서도 좀 다뤄줬으면 좋겠어요. 애니메이션이라는게 '일본(=셀)'이 전부인줄 알아요. 보는 애들 태반이.. 그게 아인디.. 정말 다양하거든요;(
  • 충격 2008/02/21 00:39 # 답글

    아퀴냥님>
    영혼기병 라젠카, 투니버스에서 제작했었죠.
    에일리언 샘인가 하는 드라마도 있었고..
  • 만화편집자 2008/07/05 00:11 # 삭제 답글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 단편집 1~2권 가지고 계시던 듯 합니다.
    파시면 좋겠습니다만..

    bighead0109@hanmail.net 으로 메일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격은 잘 쳐드리겠습니다
  • 라무닷짜 2016/05/02 19:47 # 삭제 답글

    우루세이야츠라 대작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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